단군조선 제1대 단군왕검 때에 이르러 신선도가 집대성되고 널리 보급되어 선풍(仙風)이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젊은 인재들을 뽑아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여 단학을 가르쳤으며 이들의 우두머리를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연마했던 무예가 지금의 ‘단무도’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 후 고구려의 조의선인 제도, 백제의 문무도, 신라의 풍류도 또는 화랑도 등 국가의 인재 양성 제도를 통해 그 전통이 계승되었으며, 신라의 최치원 선생에 의해 그 정신이 후세에 전해지고, 고려 초기의 국선 또는 국자랑 제도를 통해 그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한단고기>에는 고구려의 조의선인들은 평상시에는 축기(蓄氣)를 하다가 전쟁이 나면 목숨을 바쳐 충성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축기는 ‘기를 모은다’는 뜻으로 단무도 기본 수련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을지문덕, 양만춘, 연개소문 등이 모두 조의선인이었으며 이들은 수, 당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키는 국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신라의 화랑도들도 평상시에는 산천을 유람하며 수행을 했는데, 그들이 함께 모여 수행할 때는 아랫배를 두드리는 소리가 큰 북소리처럼 산을 울렸다고 합니다.
최치원 선생은 화랑이었던 난랑의 비에 ‘나라에 풍류도(風流道)라는 현묘한 도가 있어서 많은 백성을 교화해왔다. 풍류도는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연원은 선사(先史)에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의 서문을 썼습니다.
그러다 고려 인종 13년(서기 1135년)에 이르러 선도와 불교 세력의 구심점이었던 묘청이 주도했던 난이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었던 신선도가 탄압받고, 변질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 전통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쯤 최제우 선생에 의해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꽃피우려 했으나, 외세와 결탁한 부패 권력자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독립 운동가이며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 나철 선생에 의해 다시 그 맥을 이어갔지만, 역시 일제 치하에서 큰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후 신선도는 20세기 후반 일지 이승헌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에 의해 현대 단학으로 재정립되어 선도문화의 대중적인 부활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몸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닦는 내공무예인 단무도가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